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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사슴 그리고 인간들…악은 이토록 모호하다

세계 3대 영화제와 아카데미상을 모두 수상한 일본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를 거론하지 않고 일본영화를 얘기할 수 없다. 2021년 칸영화제와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수상작 ‘드라이브 마이 카’에 이은 하마구치의 최근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경제 발전과 환경 보호가 충돌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인류와 자연의 괴로운 관계에 대한 심도 깊은 관찰이며 환경문제에 대한 하마구치의 성찰이기도 하다.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간사회의 구차한 현상을 하마구치 감독은 신비주의를 동원해 조명한다.     도쿄 근교의 산촌. 6000명에 불과한 주민들은 모두 2차 대전 이후 이 마을로 들어와 새로운 삶을 개척한 정착민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군 땅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으로 목가적 삶을 살아간다. 이곳에 ‘플레이모드’라는 도쿄의 연예기획사가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캠핑촌을 설립하려 하고 파견 나온 두 명의 직원이 설명회를 개최한다.     언덕 꼭대기에 우물을 파 여름 캠핑족들의 식수를 공급하겠다는 플레이모드의 계획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맑은 물이 오염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도시 사람들이 몰려와 마을 사람들의 삶이 영향받을 게 두렵다.     캠핑촌 설립에 반대하는 분노의 선봉에 타구미(오마카 히토시)가 서 있다. 8살짜리 딸 하나와 살고 있는 그는 말이 없고 무뚝뚝하다. 학교 수업을 마친 딸을 데리러 가야 하는 걸 반복적으로 잊어버리는 아빠의 건망증을 알고 있는 하나는 산길을 걸어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아빠와 딸은 중간에서 만나 눈길을 걸으며 나무를 관찰하고 사슴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냥 나온 도시 사람들이 사슴을 향해 발사하는 총소리가 자주 들여온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안톤 체호프의 총 이론. “1장에서 총이 등장했다면 2장, 3장에서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는.     타쿠미는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사슴은 절대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딸에게, 그리고 플레이모드의 두 직원에게 말한다.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는데 3분의 2를 소비한 영화는 후반부에 들어 하나가 실종되는 사건을 맞는다. 사슴에 얽힌 신비주의가 영화를 덮어버리고 충격적 결말로 이어진다.     관객은 그제야 감독이 영화 제목에서 암시했던 악마의 존재를 상기한다. 시골 사람들을 돈으로 회유해 테마파크 사업으로 이윤을 챙기려던 도시 사업가들, 그들이 악마? 시골은 선하고 도시는 악하다? 하마구치의 의미는 악마는 결코 그런 일차원적 의미에 있지 않다. 악마의 모호한 존재, 존재하지 않음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악마. 방금 지나간 장면, 그게 뭐였을까? 결론 없이 끝나는 영화, 그래서 토론이 필요한 영화다.     김정 영화평론가 ckkim22@gmail.com사슴 존재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신비주의가 영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2024-05-01

[영화몽상] 서부극의 오묘한 변신

 대개의 영화 장르가 미국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그 중에도 서부극은 지극히 미국적인 장르라는 데 별 이견이 없어 보인다.     미국적이라고 곧 미국산이란 뜻은 아니다. 1960~70년대에는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 즉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산 서부영화가 붐을 이루기도 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 같은 스파게티 웨스턴은 미국으로 역수출돼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스타로 만들었고, 지금도 할리우드 고전들과 나란히 서부극의 명작으로 꼽힌다.   지난달 극장 개봉을 거쳐 이달 초 넷플릭스에 공개된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는 새로운 서부극이다. 1925년 미국 몬태나의 목장이 배경인데, 총싸움이나 결투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물리적 폭력 대신 언어·심리적 폭력에 움츠러드는 인간, 유약해 보이지만 무섭도록 비정한 인간 등이 얽혀 결말을 예상하기 힘든 드라마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서부극의 전형성과 사뭇 다른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인다. 그 중에도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필은 곱씹어볼 만한 오묘한 캐릭터다. 함께 목장을 경영하는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가 무던한 사업가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필은 말과 행동이 거칠고 담대한 카우보이다. 한데 이와 다른 면모가 켜켜이 드러난다. 실은 예일대를 다닌 지적인 인물이고, 혼자 연주하는 벤조 솜씨도 일품이다.  식당에서 종이로 만든 꽃을 보고 그 솜씨에 감탄하는 것도, 꽃을 만든 사람이 여성이 아니라 식당 주인 로즈(커스틴 던스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라는 것을 알고 무자비한 조롱과 모욕을 안겨주는 것도 필이다. 교양과 폭력을 동시에 분출하는 필은 동생 조지가 남편 잃은 로즈를 아내로 맞은 이후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캐릭터의 면면에서 짐작하듯, 기존 서부극과 사뭇 다른 이 영화에선 황량하고 광활한 자연을 비롯해 서부극의 고전적 분위기가 물씬하다. 한데 이 자연은 미국 서부가 아니라 뉴질랜드에서 촬영했다. 주연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알다시피 미국 서부는 커녕 영국 출신이다. 장엄한 분위기를 북돋우는 음악은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의 솜씨다. 그리고 감독은 제인 캠피온이다. 1993년 ‘피아노’로 칸영화제에서 여성감독으로는 사상 처음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로 그 뉴질랜드 감독이다. 이 영화는 그에게 무려 12년 만의 신작이다. 어느덧 60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군더더기 없고, 빈틈없는 유려한 연출의 이 새로운 서부극으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서부극의 본고장, 미국 영화제의 반응도 궁금해진다. 이후남 / 한국 문화디렉터영화몽상 서부극 오묘 기존 서부극 유럽산 서부영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2021-12-19

[J네트워크] 서부극의 오묘한 변신

 대개의 영화 장르가 미국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그 중에도 서부극은 지극히 미국적인 장르라는 데 별 이견이 없어 보인다. 카우보이나 총잡이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고, 생존을 위해 싸우는 배경은 다름 아닌 서부 개척 시기의 미국이다.   미국적이라고 곧 미국산이란 뜻은 아니다. 1960~70년대에는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 즉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산 서부영화가 붐을 이루기도 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 같은 스파게티 웨스턴은 미국으로 역수출돼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스타로 만들었고, 지금도 할리우드 고전들과 나란히 서부극의 명작으로 꼽힌다.   지난달 극장 개봉을 거쳐 이달 초 넷플릭스에 공개된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는 새로운 서부극이다. 1925년 미국 몬태나의 목장이 배경인데, 총싸움이나 결투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물리적 폭력 대신 언어·심리적 폭력에 움츠러드는 인간, 유약해 보이지만 무섭도록 비정한 인간 등이 얽혀 결말을 예상하기 힘든 드라마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서부극의 전형성과 사뭇 다른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인다. 그 중에도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필은 곱씹어볼 만한 오묘한 캐릭터다. 함께 목장을 경영하는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가 무던한 사업가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필은 말과 행동이 거칠고 담대한 카우보이다.     한데 이와 다른 면모가 켜켜이 드러난다. 실은 예일대를 다닌 지적인 인물이고, 혼자 연주하는 벤조 솜씨도 일품이다. 식당에서 종이로 만든 꽃을 보고 그 솜씨에 감탄하는 것도, 꽃을 만든 사람이 여성이 아니라 식당 주인 로즈(커스틴 던스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라는 것을 알고 무자비한 조롱과 모욕을 안겨주는 것도 필이다.     교양과 폭력을 동시에 분출하는 필은 동생 조지가 남편 잃은 로즈를 아내로 맞은 이후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캐릭터의 면면에서 짐작하듯, 기존 서부극과 사뭇 다른 이 영화에선 황량하고 광활한 자연을 비롯해 서부극의 고전적 분위기가 물씬하다. 한데 이 자연은 미국 서부가 아니라 뉴질랜드에서 촬영했다.     주연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알다시피 미국 서부는커녕 영국 출신이다. 장엄한 분위기를 북돋우는 음악은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의 솜씨다. 그리고 감독은 제인 캠피온이다. 1993년 ‘피아노’로 칸영화제에서 여성감독으로는 사상 처음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로 그 뉴질랜드 감독이다. 이 영화는 그에게 무려 12년 만의 신작이다. 어느덧 60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군더더기 없고, 빈틈없는 유려한 연출의 이 새로운 서부극으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서부극의 본고장, 미국 영화제의 반응도 궁금해진다. 이후남 / 한국 중앙일보 문화디렉터J네트워크 서부극 오묘 기존 서부극 유럽산 서부영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20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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